사죄 대신 美 가려운 곳 긁어준 전략 따를지 주목
조준형 특파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올해 외교의 ‘승부처’로 삼고 있는 미국 연방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29일)을 앞두고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 전 총리의 1957년 미국 의회 연설을 ‘모델’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그 내용에 관심이 쏠린다.25일자 요미우리 신문은 “아베 총리가 기시 전 총리의 58년 전 연설을 참고해가며 연설원고를 다듬고 있다. 또 외조부 연설의 음성기록을 집무실에서 듣고 있다”고 소개했다.
태평양 전쟁 A급 전범 용의자에서 ‘기사회생’, 일본 총리 자리에 오른 기시는 1957년 6월20일 미 하원 연설에서 미국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냉전이 한창이던 때 자유 진영 종주국의 심장부에 선 기시는 우선 “종전 후 경제 혼란을 회복하는데 있어 미국의 도움에 감사한다”며 사의를 표한 뒤 당시 미국의 최대 화두였던 ‘반공’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국제 공산주의는 아시아인의 열렬한 민족주의를 이용해 아시아를 석권하려고 하고 있다”며 “일본은 자유세계의 충실한 일원으로서, 특히 자유세계가 국제 공산주의의 도전을 받고 있는 아시아에서 효과적이고 건설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미가 함께 관심을 갖고 이해를 가지는 광범위한 문제에 대해 미국의 최고 수뇌부와 솔직한 의견 교환을 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며 “견고하고 항구적인 일미 파트너십이 태동해 일미 관계 새 시대의 문이 열릴 것으로 믿는다”고 덧붙였다.
과거 전쟁에 대한 사죄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기시는 미국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으로 미국의 자존심을 세워준 뒤 미국의 최대 관심사인 반공 진영 구축에서 일본이 맡을 역할과 미일 파트너십을 강조한 것이다.
기시 전 총리를 ‘정신적 지주’이자 ‘정치 멘토’로 삼는 아베 총리가 이 연설을 벤치마킹한다면 미국의 현재 최대 고민거리인 중국의 대두와 세계적 테러리즘에 맞설 미일동맹의 중요성과 향후 일본의 역할 등을 강조할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대신 과거사에 대해서는 22일 반둥회의 연설과 마찬가지로 ‘지난 대전(2차대전)에 대한 깊은 반성’을 거론하는 정도로 미국의 체면을 세워주는 선에 그칠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해 보인다.
요미우리 신문은 “아베 총리는 종전 후 10여년 밖에 되지 않은 시기에 ‘미래지향적’ 일미관계를 내세운 외조부의 연설에 감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소개했다.
기시 전 총리는 미국 상·하원에서 각각 비슷한 내용으로 2차례 연설했다. 이번에 아베 총리는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 기회를 얻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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