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
실제로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노화 방지’라는 콘셉트의 화장품들이 계속 소비되는 것을 보면 영원한 젊음을 향한 꿈, 특히 젊은 시절의 외모를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은 대단한 것 같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세월의 무상함, 나이 든다는 것의 서글픔, 그때 그 시절의 추억 등이 대화의 비중을 점점 더 많이 차지해 간다는 것 또한 그 증거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인간은 과연 행복할까?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은 100년째 29세로 살고 있는 한 여성을 놓고 이런 질문을 던진다. 자동차 사고로 잠시 숨이 멈췄다가 번개를 맞고 다시 살아난 아델라인은 그때부터 하루도 늙지 않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그녀가 얻게 된 영원한 젊음이란 처음부터 축복이기보다 불행으로 묘사된다. 자신의 상태를 의학적으로 증명해 낼 수 없는 아델라인은 그녀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을 피해 10년마다 신분을 바꾸고 거주지를 옮기며 살아간다. 또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도 진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늘 도망쳐야 하는 신세다. 그러니 숱한 구애를 받게 만드는 팔등신의 미모는 그녀에게도, 주변의 남성들에게도 오히려 저주에 가까운 것일 수밖에 없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는 것과 만날 때마다 늙어 가는 딸을 지켜봐야 하는 것도 그녀의 기구한 운명이 감당해야 할 가혹한 짐이다.
이렇듯 이 영화는 영원한 젊음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면서 순리대로 산다는 것의 기쁨과 행복을 강조함과 동시에 애틋한 로맨스를 얹어 놓음으로써 정통 멜로드라마 장르의 외연과 내연을 모두 갖추는 데 성공한다. 아델라인의-기구한 운명으로 인한-과거와 현재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질 수밖에 없도록 옭아매는 강력한 기제이며 두 사람의 사랑을 더욱 절절하게 만드는 도구다. 다정하고 성실한 남자 ‘엘리스’와의 만남이 애초에 슬플 수밖에 없는 것도 그들에게 이별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예정된 수순대로 이야기가 끝났다면 이 영화는 보수적이고 교훈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고리타분한 작품이 됐을 것이다.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비정상’의 범주로 밀어 넣고 그들은 행복할 수 없다는 식으로 몰아간 작품이라거나 혹은 반대로 그러한 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영화로 해석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권선징악, 윤리의식의 강화를 떠나 ‘함께하는 세월’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저만치 밀어내고 ‘관계’와 ‘사랑’에 많은 무게를 싣는다. “함께 늙어 갈 미래가 없다면 사랑은 아픔일 뿐이야”라는 아델라인의 대사는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이 바로 ‘사랑’의 결핍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결혼 40주년을 맞은 엘리스의 부모님은 그녀와 대비되는 하나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최소한 아델라인에게 ‘비정상성’이나 ‘과거’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현재만을 봐 주길 권고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세월에 대해 새삼스레 감사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15일 개봉, 12세 관람가.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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